파라과이의 역사

2002년 7월 13일 at 12:51 am

위치 : 남아메리카 중부
면적 : 40만 6752㎢
인구 : 535만 9000명(1999)
인구밀도 : 13.2명/㎢(1999)
수도 : 아순시온
정체 : 공화제
공용어 : 에스파냐어, 과라니어
통화 : 과라니(Guarani, Gs)
환율 :4,500 Gs = 1달러(2001.12)
1인당 국민총생산 : 2,000달러(1997)

역사

파라과이는 1525년 에스파냐의 A.가르시아가 과라니족의 거주지이었던 파라과이에 맨 처음 발을 들여놓은 이후 1536∼56년 무렵에는 에스파냐의 식민지화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원주민 과라니족은 마테차(茶) 재배를 비롯한 농장이나 목장에서 혹사당하였다. 예수회는 이곳에 대신정국가(大神政國家)를 건설하고 20여 만의 과라니족을 1776년까지 착취하였다. 이와 같은 예수회의 특권은 식민지 출생 에스파냐인들의 불만을 불러일으켜 1719∼35년에는 ‘코무네로스의 혁명’으로 이어졌고 1811년 5월 P.J.카발레로와 F.예그로스가 이끄는 민병대가 에스파냐 총독을 축출함으로써 독립을 획득하였다.

독립 후 1813∼40년에는 프란시아를 중심으로 강력한 독재체제를 유지하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부터의 경제적 의존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쇄국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경제의 재편성을 꾀하였다. 이에 따라 농지개혁을 단행,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공립학교를 창설하여 문맹퇴치에 노력하였다. 1841∼62년의 C.A.로페스에 의한 독재정치 아래에서는 개방정책이 취해져 외국자본에 의한 국력의 증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862년 대통령이 된 F.S.로페스는 영토확장의 야망으로 무모한 전쟁을 일으켰다. 1864∼69년의 6년 간에 걸친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와의 3국동맹 전쟁에서는 전인구의 1/2, 남자의 9/10를 상실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뒤 살아남은 남자는 2만 8,000명에 불과하였다. 이 결과 파라과이 인구는 1864년의 130만에서 1970년에는 22만으로 줄어들었다.

그 후 영국자본의 진출이 현저해지고 국내에서는 친(親)아르헨티나파(派)와 친브라질파 사이에 정쟁(政爭)이 되풀이 되었다. 3국동맹전쟁 후 파라과이는 차코 지방의 개척에 착수하였으나 이것은 볼리비아의 남진정책과의 충돌을 빚게 되었다. 1932∼35년의 그란(大)차코전쟁에서는 영국 석유자본의 원조를 얻어, 미국자본이 지지하는 볼리비아와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에서 파라과이는 5만 명의 인명을 희생하고 차코 지방의 3/4을 획득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쿠데타와 역(逆)쿠데타가 잇따라 발생,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1954년에는 A.스트로에스네르 장군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뒤 7차례의 선거에서 계속 당선되어 8차례나 대통령직에 올라 장기집권했다. 그러나 1989년 2월 자신의 측근이자 제1군사령관인 A.로드리게스 장군이 민주화를 내걸고 일으킨 쿠데타로 실각, 브라질로 망명하였고 로드리게스 장군은 1989년 5월 총선을 실시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3년 8월 문민정부에 정권을 이양하였다. 문민정부는 군부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1998년 5월에 실시된 선거에서 라울 쿠바스 그라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 되었으나, 오비에도 전 육군 사령관의 석방문제로 여야의 대치정국이 계속 되어 오던 중 1999년 3월 아르가나 부통령의 암살 사건에 따른 민중 봉기로 쿠바스 대통령이 사임하였다. 루이스 곤잘레스 마치 상원의장이 1999년 3월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