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유럽에서도 미국법 적용하라”

2002년 5월 22일 at 4:23 pm

“유럽에서도 미국법 적용하라”



부시 행정부, ‘유라시아 장악’ 위해 국제 조약·협약 잇달아 무효화


부시 행정부는 ‘로마 조약’에 따라 오는 7월 출범하는 국제형사재판소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데 이어 클린턴 행정부가 로마조약에 서명한 자체도 무효라고 밝혀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미국 정부가 서명한 조약이 국회에서 거부되어 비준되지 못한 사례는 많지만, 이번처럼 전임 행정부가 국회 비준은 없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조약에 서명한 것마저 차기 행정부가 무효라고 못박은 것은 처음이다.

1969년 체결된 ‘비엔나 협약’에는, 국제 조약에 서명한 정부는 비록 국회가 비준을 거부해도 이 조약이 국제 무대에서 적용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규정이 있다. 부시 행정부가 국제적인 비난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로마 조약 서명까지 무효로 돌린 것은 바로 비엔나 협약에 따른 의무도 무시하겠다는 뜻을 공식화한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로마조약 서명을 파기하면서 비엔나협약에 서명한 것도 인정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어떤 국제법도 미국을 구속할 수 없다는 공개 선언이다.

부시 행정부가 지난해 ‘교토 기후 협약’을 거부한 이래 국제 조약이나 군비 관리 합의를 하나씩 깨가는 배후에는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는 듯하다. 이같은 판단을 가능케 하는 근거는, 지난해 5월 초 독일의 보수 야당인 기독교민주연합(CDU) 소속 빔머 의원이 슈뢰더 총리에게 보낸 편지에 들어 있다. 유럽안보협력기구에서 국회의원단의 부의장 직을 맡고 있는 빔머 의원은 이 편지에서 부시 정부의 세계 전략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미국은 20세기에 벌어진 두 차례 세계 전쟁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국제적으로 뿌리 내린 법질서를 의식적으로 파기할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게 거추장스러운 국제법은 사라질 것이다.’

빔머 의원은 이같이 분석하게 된 근거로 4월 말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스라바에서 미국 국무부와 공화당 외곽 정책 자문기구가 ‘나토 확대와 발칸’을 주제로 공동 주최한 국제안보회의에서 미국쪽 대표들이 흘린 다음과 같은 발언을 소개했다.

ⓒ gamma
미국이 유고 전쟁을 벌인 것은 러시아 북서부 해안·동유럽·터키 주변 흑해를 연결하는 지역에 나토군을 주둔시킨다는 전략과 연관되어 있다. 위는 코소보에 주둔한 미군.

미군, 이미 유라시아에 주둔

“미국이 유고 전쟁을 벌인 것은 2차 세계대전 직후 아이젠하워 장군이 미군의 발칸 반도 주둔을 포기한 실수를 교정하기 위해서였다. 유고 전쟁은 과거 로마 제국이 최고 번성기에 장악했던 러시아 북서부 해안과 동유럽, 터키 주변 흑해를 연결하는 지역에 나토군이 주둔한다는 전략과 관련되어 있다. 유고 전쟁은 앞으로 언제라도 되풀이될 수 있는 전쟁의 첫 번째 사례이다. 나토를 유라시아 대륙으로 확대하는 구상에 유럽 법은 장애가 되며, 따라서 유럽에서도 미국 법을 적용할 것이다. 그 본보기로 유고 연방에는 ‘헬싱키 협약’을 비롯한 그 어떤 국제법도 적용하지 않는다.”

빔머 의원은 그의 편지를 공개한 월간지 <독일과 국제정치>(2001년 9월호)와 가진 인터뷰에서, 2차 세계대전 직전처럼 강대국에 의해 국제법이 파기되는 상황이 되풀이되는 사태를 경고하기 위해 슈뢰더 총리에게 브라티스라바 회의를 알렸다고 밝혔다. 이 회의에 참가한 동유럽 대표들은 과거 ‘바르샤바 조약’에 따라 소련의 지배를 받던 시절을 떠올리며 ‘큰형 말에 따르겠다’는 심정이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빔머 의원이 소개한 미군의 유라시아 주둔 전략은 이미 현실로 굳어진 듯하다. 아프가니스탄은 물론 그 주변국과 중동으로 주둔 지역을 확대하고 있는 미군은 5월1일 게오르기아에도 ‘반 테러군’을 육성하는 군사고문단을 파견했다. 최근에는 네팔 정부도 게릴라 진압에 필요한 군사 지원을 미국에 요청했다. 미군의 네팔 주둔을 알리는 보도는 없지만, 중국 주변에 미군이 접근할 통로가 열린 것은 확실하다.

이스라엘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정치 보고서> 발행인이자 ‘세계 유태인 평화 연합’ 대표인 막심 길란에 따르면, 월포위츠 국방 차관을 주축으로 하는 미국 강경파는 중동·중앙아시아·인도양 주변 대륙의 지하 자원 통제를 위해 정치 지도를 바꾸려 하고 있다. 그는 지난 4월16일 워싱턴의 ‘팔레스타인 정책분석 센터’에서 샤론의 팔레스타인 주민 추방 작전의 배후에 월포위츠 구상이 있다고 말하고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소개했다.

ⓒ gamma
지난 5월2일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EU 정상회담. 왼쪽부터 로마노 프로디 EU 집행위원장·아스나르 EU 의장(스페인 총리)·부시 미국 대통령.

“중동·중앙아시아 통제 시나리오 있다”

‘미국은 요르단을 해체하며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를 잠재적인 위협국으로 판단해 두 나라를 분할한다. 그 중 일부는 ‘후세인 이후’ 이라크에 합병해 친미 이라크 정권으로 키운다. 팔레스타인을 장악한 이스라엘은 알바니아와 중앙아시아 이슬람국을 통제하게 되는 터키와 동맹 체제를 굳힌다.’ 다시 말해 미국은 중동의 잠재적 위협국이나 위협 요소를 분할해 무력화하고, 이스라엘-터키-미국 삼각 동맹을 통해 중동과 중앙아시아를 통제한다는 것이다. 길란은 이 시나리오가 아직 미국 정부 노선으로 승인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난 5월3일 독일 신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를 민영화하기 위해 서방 기업과 협의 중인데 아람코가 반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4백억 달러 규모의 가스 개발을 둘러싸고 몇년 전부터 아람코와 미국 기업이 벌이고 있는 컨소시엄 구성 협상이 지난 3월 결렬되었으며, 두 나라 정부 사이가 최근 악화해 협상 타결 전망이 어두워졌다고 덧붙였다. 월포위츠-샤론 구상과 관련해서도 주목할 만한 사태이다.

미국은 ‘국제 테러’와 ‘악의 축’ 제거를 내세워 유라시아를 넘보고 있다. 그러나 미국을 위협하는 첫째 복병은 바로 세계 경제를 교란하고 있는 미국의 경제 부실이다. ‘반 테러 전쟁’에 세금을 쏟아붓고 있는 사이에 미국 정부의 빚더미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그 규모는 올해 말에는 5천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미국 정부가 부채 보유 상한선을 높이지 않으면 6월 말부터 이자를 갚을 수 없다고 인정할 만큼 재정 적자는 심각하다.

G7 재무장관 회의와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IBRD)의 올 상반기 총회에서 재정 적자는 토의 주제가 아니었다는 미국 재무장관의 발언에 유럽 대표들은 “우리는 분명히 이 문제를 지적했다. 미국은 사실을 숨기고 있다. 미국의 재정 적자는 달러 통화 체제를 무너뜨려 G7 경제 전체를 흔들게 될지 모른다”라고 반박했다. 올해는 경기부양책이나 구조조정안을 둘러싸고 G7 내부의 불화가 공개적으로 터져 나온 첫해이기도 하다. 부시 정부가 보호무역정책으로 돌아서서 수입 철강에 관세를 부과하고 수출 산업이나 농업 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도 유럽의 반발을 사고 있다. 유럽에서는 세계무역기구(WTO)에 미국을 제소하고 보복 관세로 맞서는 한편 연방제로 통합하는 일을 서두르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프랑크푸르트·허 광 편집위원   rena@sisapress.com

– 시사저널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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