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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동에서

  • 기준

인터넷 주소를 잘못 쳐서 들어간 어느 경제부 기자의 홈페이지, 그냥 잘못 쳤구나 하고 나가려던 순간에 들어온 “서울 성북동에서”라는 글. 잘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터라, 어서 클릭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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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동에서

요즘 강남구 삼성동의 한 빌딩에선 송두환 특별검사팀이 ‘대북송금의혹 사건’에 대해 수사를 벌이고 있습니다.

저는 경제부에 속해 있지만, 옛날에 검찰출입을 해봤다는 등등의 이유로 약 2주정도 사회부에 파견을 갔었습니다.

‘수사’라고 하는 것이 항상 그렇지만, 관련자들은 모두 진실 그 자체와 진실의 내막을 잘 알고 있는데 어떤 이유에서건 그 진실을 밝히기를 꺼려 하는 입장이고, 반대로 수사팀이나 그 사건을 취재하는 기자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든 진실을 밝혀야 하는 입장입니다.

수사는 아직 초기 단계이고, 그래서 저는 정몽헌 회장이 “5억달러를 보냈다”고 밝혔으면서도, 산업은행에서 대출받은 돈 4천억원 가운데 2천2백억원(약 2억달러) 외에 나머지 3억달러를 어떻게 조성했는지에 대해 밝히지 않았다는점을 파고들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그 나머지 돈이 현대전자, 현대건설 등에서 조성됐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정몽헌 회장이나 현대측에서 이를 확인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가지 고민 끝에, 전 정몽헌 회장을 직접 괴롭히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어찌보면 아주 가능성이 희박한, 한마디로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열쇠를 쥐고 있는 이익치씨나 김충식씨에 대해서도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있는지 여러 경로를 통해 노력을 해봤지만, ‘당분간 어렵다’는 결론이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괴롭히는 방법’. 뭐 별난 방법도 아닙니다.

정몽헌 회장의 집, 사무실 등에서 죽치고 기다리면서, 매번 정회장을 만날때 마다, 같은 내용의 질문을 계속 하는 겁니다.

아주 원시적인 방법이었지만, 의외로 단기간에 성과가 있었습니다. 정회장의 최 측근으로부터 관련된 얘기를 확인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정몽헌 회장을 밀착마크 하면서, 취재와는 별도로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됐습니다. 바로 ‘성북동’엘 가봤다는 것이죠.

제가 정몽헌 회장의 집을 찾아간 것은 부슬부슬 비가 내리던 지난 4월22일이었습니다.

처음엔 주소만 갖고 있어서, 집을 못찾는 것은 아닌가 걱정을 했습니다. 물론 보통 동네에서야 주소만 알면 근처 복덕방엘 가서 확인해 보면 금방이지만 그 동네는 워낙 큰 길가와 떨어져 있는데다가 인적이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몇분 지나지 않아 정회장의 집을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대문은 수수하게 달려있지만 워낙 땅 덩어리가 크고, 바로 옆 일본대사관저 문앞을 지키는 의경들이 확인을 해줬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집을 찾는 와중에는 찾는 일 자체가 중요했기 때문에 주위 풍경이나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단 확인을 하고 나니 주위를 둘러보게 되더군요.

성북동에선 항상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만금 각 집들의 정원이 잘 꾸며져 있다는 얘기겠죠. 담이 높아 안을 들여다 볼 수는 없었지만, 정몽헌씨 집에도 제법 굵은 나무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었습니다.

두번째론 사람을 구경하기가 참 여렵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오가긴 합니다. 그런데 민간인은 아니죠. 그 근처에 일본, 독일 등의 대사관저가 있어서 그렇겠지만, 약 1시간에 한번씩 의경들이 순찰을 돕니다. 순찰차도 일정한 시간에 한번씩 나타나 점검을 하더군요.

사람들이 나다니지 않는 만큼, 성북동은 무척이나 조용합니다. 오후 5시 정도엔 어느 절에서 울려오는지 알 수 없지만 은은한 종 소리가 들렸습니다.

지나다니는 차들은 사람에 비해선 많았습니다. 대부분 최고급형들이었습니다. 가끔 소나타나 아반떼 같은 차들도 길가에 세워져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집에서 일을 도와주시는 분들이 출퇴근 용으로 사용하는 차였습니다.

그 근처에는 5손가락 안에 꼽히는 모 재벌가의 집도 있었습니다. 그 집 경비를 맡고 있는 20대 후반의 남자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여기엔 걸어다니는 사람을 진짜 보기 어려워요.. 그런데 아주 가끔 보이기도 하는데요.. 딱 2가지라고 보면 되요.”

“2가지가 뭔데요?”

“하나는 집주인이 아니라 일 봐주시는 분들이 출퇴근 하는 경우, 그리고 또 하나는 아주 드물게 ‘마을 산책’에 나서는 분들이죠..”

“여기는 정말 강남하고는 비교가 안되는 곳이죠. 강남엔 왜 갑자기 큰 졸부들이 많다쟎아요.. 여기는 그야말로 전통있는 부자들이 살아요. 강남에 사는 사람들중에 이곳으로 이사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대요.. 그런데 돈이 있다고 해도 집을 구하기가 정말 쉽지 않죠.

부동산은 저쪽 저 아래에 있는데요, 여기 부동산집 사장들도 대부분 차는 포텐샤 급으로 타고 다녀요.”

난 우산도 외투도 없는데 무심하게도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검은색 양복이 축축하게 젖어오고 내가 얼마나 더 기다릴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집집마다 대문앞에 버티고 선 개들은 컹컹컹컹 짖어댔습니다.

“여기 개들도 장난이 아니에요, 지난 번엔 정회장댁 개와 우리개가 요 앞 길에서 난투극을 벌였는데 우리 개가 목이 물려 피가 철철 나고 난리가 났죠. 그래서 우리집에 개를 2마리 더 사다 놨지 뭡니까…”

근처의 한 집에서 젊은 여성 1명이 대문 밖으로 나왔습니다.

노란 상의에 노란 우산을 쓴 그 여인은 집 앞에 세워져 있던 최고급형 승용차 운전석을 열었습니다.

빗줄기는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늘었지만, 그 여인은 그 가는 빗방울이라도 맞을 수 없다는 듯, 한쪽손은 우산을 그대로 받친 상태에서 아주 우아하고 세련된 동작으로 미끄러지듯 차 운전석에 올라탔습니다.

내 몸에 내려앉은 빗방울들이 더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집에서 일을 봐주시던 분들도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고 성북동에도 밤이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첫날 진드기작전은 별로 성과가 없었던 것이죠.

돌아가는 길에 성북동 집들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종합해서 생각해 보면 결국은 ‘야.. 좋다 이런데서 한 번 살아보면 좋겠다’는게 솔직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을 것이란 점은 분명하고, 그래서 성북동 큰 집들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조금은 삐뚤어져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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